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문단 편집) === 성격 === 다정하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늘 집으로 손님을 불렀다고 한다.[* (출처: 스티븐 이설리스(클래식 음악의 괴짜들 - 베토벤이 스튜 그릇을 던져 버린 이유는?) - 애덤 스토어 그림 - 고정아 옮긺)][* 즉흥적, 충동적으로 유쾌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런 유형은 사실 사회성이 매우 떨어지는 성격이다. 모차르트는 술친구, 도박놀이 상대 등은 많았지만 속내 털어놓을 동종업계 종사자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런 결핍된 사회성은 아주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다니며 성인 작곡가들과 같은 일선에 뛰어들어 그들과 경쟁하며 그 또래 유년의 경험들을 해보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아마데우스(영화)|영화 아마데우스]]에 묘사된 것처럼 돈 문제에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돈 문제에 지나치게 민감해 빈축을 자주 샀었다.] 모차르트는 우아한 옷을 좋아했다. [[테너]] [[가수]] 미하일 켈리가 회상한 [[리허설]]에서의 모차르트는 "그는 진홍빛 펠리스[* 털로 안을 댄 외투]와 금빛 [[레이스]]가 달린 삼각모를 입고 무대에 올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출처: 영어 위키피디아(모차르트: 외모와 성격)] 모차르트의 목소리에 대한 콘스탄체의 증언으로는 "말하는 데는 다소 부드럽고 [[노래]]에는 섬세한 테너였지만, 어떤 것이든 그를 [[흥분]]시키거나 흥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땐 힘차고 [[활력]]이 넘쳤다."[* 출처:메이나드 솔로몬, <모차르트의 삶>/ 영어 위키피디아(모차르트: 외모와 성격)] 그는 당구와 춤을 즐겼고 카나리아와 찌르레기, 개 등을 키웠다. 그리고 승마도 즐겼다.[* 출처: 메이나드 솔로몬, <모차르트의 삶>/ 영어 위키피디아(모차르트: 외모와 성격)] 모차르트는 빈 음악계의 중심에 살았다. 따라서 동료 음악가, 연극 공연가등 다양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요제프 하이든]]과도 친구였다. [[호른]] 연주가 로이트게프와도 친구였는데, 모차르트가 쓴 호른 협주곡 4곡은 전부 그를 위한 곡이다. 모차르트와 로제트게프는 종종 친근하고 짖궂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출처: 메이나드 솔로몬, <모차르트의 삶>/ 영어 위키피디아(모차르트: 외모와 성격)] 그리고 마감일이 다가옴에 따라 엄청난 속도로 [[작곡]]을 마무리했고, 긴 시간 동안 열심히 작업했다. 그도 [[스케치]]를 하고 난 후 작곡하곤 했는데, [[베토벤]]의 것과는 달리 모차르트가 죽은 후 콘스탄체가 그것들을 없애려고 했기 때문에 현재 보존되어 있는 건 별로 없다.[* 출처: 메이나드 솔로몬, <모차르트의 삶>/영어 위키피디아(모차르트:외모와 성격)] 또, [[요한 네포무크 훔멜]]의 재능을 알아보고 2년동안 무료 수업을 해주기도 했다. 훔멜은 모차르트의 한 공연에서 9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섰다.[* 출처: 영어 위키피디아(요한 네포무크 훔멜)] 그는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대결을 한 적이 있다.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는 즉흥연주를 하거나 자신의 작품 중 여러 곡을 연주해야했다. 결과는 사실상 무승부였다.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에 대해 "클레멘티는 오른손으로 연주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3악장 구절에서 발휘되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연주는 크뢰처[* 독일의 옛 동전]만큼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요컨대 그는 정비공이다."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 아무도 그런 정신과 우아함을 가지고 연주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특히 그의 아다지오와 변주곡에 압도되었다." 두 사람을 라이벌로 묘사하려는 후대의 시도가 있었지만, 그들의 만남이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당시 클레멘티는 좀 더 거장적이고 현란한 스타일을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그를 폄하한 이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출처: 영어 위키피디아(모차르트: 외모와 성격)]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는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포함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음모로 인해 그의 오페라가 올려지는데 장애물이 생긴다고 [[편지]]에 썼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특정 직업에 대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두 작곡가의 관계가 이를 넘어서 신랄했다는 증거는 사실상 없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친구나 동료로 생각했고, 서로의 일을 지지했다. 살리에리는 악장으로 임명 되었을 때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한 적이 있고, 서로 작곡을 같이 하기도 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아들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를 가르치기도 했다.[* 출처:영어 위키피디아 (안토니오 살리에리:모차르트와의 관계)]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는 지저분한 유머를 즐겼다. 편지에는 [[똥]]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나와서 그가 배설물에 집착하는 분벽음욕증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https://www.news1.kr/articles/?5014411|실제 편지 해석]] 그는 엉덩이를 핥아라 등의 [[카논]]을 작곡해서 친구들과 함께 부르곤 했다. 슈뢰더라는 학자는 18세기에는 지저분한 유머가 훨씬 더 대중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 당시 독일의 인기 극장에서는 그런 지저분한 [[유머]]에 관한 코미디를 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앨런 던데스는 그런 유머가 독일 민족 문화의 특정한 특징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 근거로 독일 민속학에서 항문에 관련된 지나치게 많은 문헌이 발견된다는 점을 들었다. 그가 쓰거나 부른 몇몇 구절들은 독창적인 게 아니라 당대 민속과 문화의 일부거나 [[민요]]였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모차르트가 심리적 병이 있었을거라고 생각했다.[* 출처: 영어 위키피디아(모차르트: 외모와 성격)] 모차르트가 말년에도 고소득을 꾸준히 유지했다고 잘못 아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론 해가 지날수록 모차르트의 [[https://youtu.be/GmSknZOIt8A?t=1356|수입은 곤두박질쳤다.]] 실제로 1789년 5월 16일 라이프치히에서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https://en.wikipedia.org/wiki/Mozart%27s_Berlin_journey#Leipzig_again| 많은 찬사를 받은 연주회지만 정작 수입은 터무니 없이 적다."]]라는 글귀가 있으며, 이것은 모차르트 생애 마지막 3년과 시기가 정확히 일치한 [[http://self.gutenberg.org/articles/Austro-Turkish_War_(1787-1791)#cite_note-Solomon_1995.2C_433-6|제8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1791)이랑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 시기에 수도 빈에선 경기 침체로 인해 중산층의 문화예술 소비가 크게 줄어 오페라 활동이 상당수 중단되었으며, 연주회도 상당수 흥행 실패하는 등 전반적으로 음악가 및 예술가들에게 경제적으로 혹독한 시기였다. 빈에서 머물렀던 시절인 1783년부터 1791년 사이 모차르트의 평균 수입을 살펴보자면, 현금 소득만 따지면 1,700 플로린, 선물 등 비금전적인 것까지 포함하면 2,500플로린에 육박할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 튀르크 전쟁 중 모차르트의 수입이 급감한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모차르트 전성기 기준 벌이에 비한 것이지 일반인들과 비해서는 많이 버는 편이었다. 특히 모차르트가 죽은 해인 1791년의 수입이 5,700플로린에 이른다는 추정이 있는데, 이는 당시 궁정 중상급 관리 연봉 500플로린의 10배가 넘는 액수였다. 정리하자면 모차르트의 수입은 굉장히 많은 편이었으나, 전쟁이나 병약한 아내의 [[요양]] 크리 같은 당시 상황, 수입이 나아지자 바로 좋은 아파트로 이사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빵점 수준의 재무관리 수준이 맞물려 모차르트가 죽을 무렵 상당히 많은 부채를 갖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외에도 모차르트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는 이미지가 있고 영화《[[아마데우스(영화)|아마데우스]]》도 그런 이미지를 상당히 부각시켰지만 특별히 다른 여자를 사귀었거나 향락에 빠져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후술되는 아내 콘스탄체와 마찬가지로 사교모임을 즐겼던 덕분에 잘 논다는 이미지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오페라]] [[돈 조반니]]를 한창 작곡 중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차르트를 찾아온 [[자코모 카사노바]]가 자신이 겪은 일화를 오페라에 넣어 달라는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을 정도. 사실 카사노바의 행동이 모차르트가 보기에도 너무 도를 넘긴 했다[* 흔히 카사노바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것이 '매력적인 바람둥이, 능란한 난봉꾼' 정도이고 모차르트 역시 '향략적으로 놀기 좋아하고 여성 편력도 심한 한량'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대강 비교하면 둘이 비슷한 캐릭터 아니냐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물론 모차르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지만 놀기 좋아하는 것이 범죄는 아니다. 또한 아내 이외의 여성 편력이 있다는 증거도 안 나왔으니 남녀관계의 신의도 나름 지킨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카사노바는 [[자코모 카사노바|항목]]을 보면 알 수 있는것처럼 사기에서 강간까지 온갖 범죄를 쉬지 않고 저지르던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범죄자였고, 흔히 카사노바의 방탕이라 하는 매춘, 사기성 연애등은 그가 숱하게 저지르던 다른 범죄들에 비하면 차라리 참아줄만한 수준에 있었던 것이다. 즉 카사노바의 이미지를 엄청나게 올려치고, 반대로 모차르트의 이미지는 턱없이 내리쳐놓고 보면 두 사람이 비슷한 수준의 인물처럼 보인다.]. <돈 조반니>를 작곡할 당시에도 '꼭 이런 부도덕한 호색한을 주인공으로 해야만 하나'하고 갈등했고, 결국 작곡이고 뭐고 다 때려칠까 하다가 "어차피 오페라의 스토리는 돈 조반니가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는 각본가의 말을 듣고 작곡을 계속했을 정도였다.[* 베토벤조차도 '''모차르트 오페라의 유일한 흠은 대본'''이라며 다폰테를 까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